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메네스 왕조 (문단 편집) === 다릭 금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aric_coin_of_the_Achaemenid_Empire_(Darius_I_to_Xerxes_II).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1486p00.jpg|width=100%]]}}}|| ||<#AC0D0A> '''{{{#FED600 다릭 금화}}}''' ||<#AC0D0A> '''{{{#FED600 시글로이 은화}}}''' || 키루스 2세 시절 이래로 리디아의 화폐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쓰던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 시절에 화폐 디자인을 따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다릭 금화'다. '금빛'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다루이야카'에서 파생된 단어로 맨 처음에는 은으로만 주조되다가 나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이전부터 쓰던 리디아식 금화와 다른 점이라면 전에는 양면에 모두 문양을 찍어 훨씬 만드는게 까다로웠다면 새로 만든 다릭은 한 쪽 면에만 문양을 찍어 주조법을 간단하게 개조했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사자와 황소 무늬를 없애고 대신 황제가 활을 쏘는 모습[*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활을 쏘는 모습 등을 화폐에 새겼는데 이걸 페르시아인들이 차용한 것.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황제를 신격화할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을 새겨넣었다. 은화도 따로 만들었는데 이건 '시글로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딴 건 몰라도 이 다릭과 시글로이의 제조만큼은 심혈을 기울여서 다뤘다. 세금도 이걸로 걷었으니 다릭과 시글로이의 유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국가 경제가 망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그래서 화폐 위조범은 [[반역죄]]에 준해서 처벌했다. 다만 다릭과 시글로이는 [[사르디스]]를 포함, [[페니키아]]와 소아시아 일대 등 제국의 서부 지방에서만 주요 쓰이는 편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의 화폐들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물물교환을 아예 제쳐버리고 완벽한 거래 수단으로는 자리잡지 못했다. 특히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있는 제국 동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화폐보다는 물물교환을 선호했다.[* 이란 등 동부 지방에서도 화폐가 주조되어 유통된 것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금화와 은화들은 [[사르디스]]에 있는 주조폐창에서만 찍어냈다. 다릭이 워낙 품질이 좋았던 덕에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 다릭을 현대 [[달러화]]처럼 썼는데, 문제는 이 다릭과 시글로이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릭 같은 금화는 페르시아를 빼면 주조할 경제력이 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지중해권 국가들이 모두 이걸 썼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찍어낼 수 있는 은화 시글로이는 거의 소아시아 지방에서만 유통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찍어낸 은화를 썼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화폐의 국내 유통을 썩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별다른 대책도 없어서 그냥 썼다고. 일부 사트라프들은 오히려 그리스 화폐를 모방해 은화를 찍어내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00년대에 발표한 환율에 의하면 1다릭 = 20시글로이였다. 1다릭의 중량은 이전 리디아 금화보다 약간 가벼운 8.10~8.50g 정도였고 순도는 무려 98~99%에 달했다. 후대의 웬만한 금화들보다도 압도적일 정도로 순도가 높았던 것. 워낙에 순도가 높고 보증인이 확실했기 때문에 지중해인들이 이 다릭을 많이 썼다. 그리스 경제의 중심지였던 [[고대 아테네|아테네]]의 [[드라크마]]의 경우의 환율은 1다릭 = 25드라크마였다. 25드라크마면 숙련된 정예병의 한 달 월급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다. 참고로 은화 시글로이의 경우 중량이 5.40~5.60g 정도였다. 순도는 처음에는 다릭과 같은 98~99%에 달했지만 날이 갈수록 순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그 순도가 94~95%까지도 떨어진다. 시글로이와 다릭은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한 이후에도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 때까지도 쭉 유통이 계속된다. 이 다릭 금화는 페르시아의 적들한테 뿌리는 뇌물로도 사용되었다. 한 예로 그리스 [[스파르타]]의 국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대가 페르시아를 침략했을 때, 페르시아는 다릭 금화 3만 개를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들한테 뇌물로 뿌리고 그 대가로 스파르타를 공격하게 했고, 그래서 스파르타 본국이 위험해지자 아게실라오스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나는 페르시아 궁수 3만 명의 화살에 쫓겨났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다릭 금화에 활을 쏘는 초상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